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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까세의 그림일기

#23. 절교하는 법

조까세 2018. 2. 20. 18:31

헬스장에 갔다가 집에 오는데, 어떤 초등학생이 목청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횡단보도 건너 편의점 앞에 앉아있는 자기 친구들을 향한 외침이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엿들었다. 어린이들은 보이루!’하고 인사를 나누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의 우정은 끝났어.”

 

이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악수를 나눴다. 편의점 앞에 앉아있던 쪽이나 횡단보도에서 소리를 지르던 쪽 모두 참담한 표정을 한 채였다.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을 때, 한국 외교부 공무원과 대만 대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처음엔 나는 피식 웃었다. 그들의 절교선언이 유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뭐 저런 절교선언을 할 만한 일이 있나? 하고 새각했다. 그런데 이 생각을 한 직후, 내가 꼰대스럽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꼰대들은 나이를 묻고 나서 아이고~ 좋을 때다. 그 나이에 무슨 고민이 있니?’하고 되묻는다. 나 역시 그 꼰대들과 다르지 않은 시선으로 초등학생들을 바라봤다. 인간은 저마다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초등학생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불교에서는 삶을 고해(苦海)라고 표현한다.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 들어찬 바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덜 괴롭다. 왜 나는 괴롭지? 어떻게 하면 괴롭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원래 괴롭고, 다들 괴롭다. 안 그런 척 할 뿐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절교선언을 주고받는 초등학생들이 참 멋있게 느껴졌다. 초등학생들도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으며, 그들 나름대로 절교를 선언할 만큼의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초보항해사들답게 당차게 절교를 주고받았다. 딜교도 주고받았으려나? 그런 모습까지는 목격하지 못했다.


우리의 망각세포는 고통들을 조금씩 깎아내서 정육면체로 만든다. 그리곤 기억 창고에 착착 보관한다. 과거의 아픔을 떠올리더라도 더 이상 괴롭지 않도록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작업과정을 너무 잘 알게 되는 것일까? 어른들은 절교선언 따위는 하지 않는다. 싫은 사람에게 싫은 소리도 잘 하지 못한다. 어쩌면 꼭 그만큼,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말 예쁜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더 고통스럽더라도 진솔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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