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나는 학급어린이회의에서 매주 같은 건의사항을 냈다. 운동장에 축구골대를 만들어 달라는 건의사항이었다. 이 건의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 2002년 월드컵이 시작됐다. 나는 빨간티를 입고 대한민국을 응원했다. 우리나라가 축구를 잘하면, 학교운동장에 축구골대가 생길 줄 알았다. 물론 아니었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4강 신화는 초등학교 운동장의 축구골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텔레비전은 외국인들이 붉은 악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같은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어린 나는 ‘초등학교에 축구골대도 안 만들어주는 이따위 나라는 망해버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내 저주가 먹혀들었는지 어땠는지, 한국은 장기적으로 소멸 위기를 맞이했다. 서점에 들렀다가 전영수 교수의 『한국이 소멸한다』를 잠깐 읽었다..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말했다 :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그리고 물건은 사용되어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세상이 혼돈에 빠진 이유는, 물건이 사랑받고 있고 사람들이 사용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법에서는 고용주를 사용자로, 노동자를 피용자라고 표현한다. 사장이 노동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 물건을 빌려 쓸 때는 내가 갑이 된다. 조심히 쓰고 돌려줘! 뭐 이런 식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노동만큼은 다르다. 노동은 빌려 사용하는 사람이 갑이다.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을이 된다. 달라이 라마의 말대로 인간이 사용되고 있다. 동시에 물건을 사랑받는다. 사랑받지 못하는 물건을 파는 회사 직원들은, 자신들의 제품을 사랑받게 만들려고 애쓴다. 고백하자면 요즘 나는 이력서를 쓴..
아인슈페너가 마시고 싶어서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날씨가 미치도록 추워서, 카페 가까이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아인슈페너를 마실 참이었다. 카페 주변에는 작은 교자집이 있었다. 교자에서는 에델바이스 맥주와 교자를 세트로 팔고 있었다. 그래서 맥주 한 잔을 마셨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는 술이 조금 아쉬웠다. 2차로 빈티지 라이언이라는 가게에서 맥주를 마셨다. 안주가 엄청 푸짐해서 맥주가 술술 들어갔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많은 맥주를 마셨는데, 그래서인지 사장님이 나한테 명함을 줬다. 사장님은 자신도 책을 내고 싶다, 뭐 이런 얘기를 했는데 ― 취해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 재밌었다. 결론적으로는 나는 원래 가려고 했던 카페에 가지 못했다. 커피는 한 잔 대신 여러 잔의 맥주를 마셨다. 그래도 즐..
온라인서점 면접에서, 면접관이 내게 물었다.“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에요?”“천명관이요.”내가 말했다. 그러자 면접관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는 천명관이 구린 소설가라고 깠다. 천명관은 『고래』 빼고는 별 볼 일 없단다. 진정으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만 아는 ‘숨은 진주’(면접관의 표현)같은 작가 이름을 댔어야한다고 내게 조언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박 뭐시기 작가를 좋아하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고 자기만 좋아한단다. 전형적인 홍대병 말기 환자라고 생각했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그 새끼가 갑이니까. 나는 그래도 붙여주세요, 이제 천명관 안 좋아할게요. 제발요 ― 하는 눈빛을 그에게 쏘아댔다. 물론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는 천명관을 원망했다. 면접 분위기 좋았는데, 천명관 때문에 떨어졌다..
스캔들에 휘말렸다가 복귀한 어느 연예인이 이런 인터뷰를 했다.“하루는 딸이랑 식당엘 갔는데, 메뉴판에 가격표를 살피는 저를 발견했어요. 그때는 정말 내가 불행하구나! 싶었어요.”나는 인터뷰의 이 구절을 보고 그가 나와는 정말 다른 세계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탈세나 표절을 한 적 없고, 스포츠도박에도 관심이 없으며, 군복무도 성실히 이행했음에도 ― 식당에 들어가면 메뉴판에 가격을 살핀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불행한 줄 몰랐다. 아무튼 나는 이 인터뷰를 읽고 세상이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존나 했다. 그리고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다 :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근데 그게 가능한 사람은, 돈이 있으면 더 행복할 것이다. 요즈음 나는 돈을 벌지 않는다..
모기가 앵앵거리는 소리는 왜 사람을 짜증나게 할까? 왜냐하면 모기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자빠져 자던 인간 종(種)들은 모두 말라리아에 걸려서 죽었기 때문이다. 오직 모기소리를 싫어하던 위대한 인류만이 살아남아 우리에게 유전자를 물려주었다. 현대인의 유전자에는 모기소리 혐오증이 단단히 박혀있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 모기소리보다 더 듣기 싫은 소리가 있다. 바로 직장상사가 앵앵거리는 소리. 직장상사는 스트레스를 퍼뜨린다. 현대사회에서는 모기가 퍼뜨리는 말라리아보다 스트레스가 더 치명적이다. 직장상사가 앵앵거리는 소리가 그다지 짜증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모기소리를 무시하고 자빠져 자던 원시인류처럼 멸종해버릴 것이다. 화병에 걸리거나, 스트레스성 질병에 시달리고, 극단적인 경우엔 자살을 해버릴 지도 모른..
영화 를 본 사람이라면 이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 내일 주가가 오를지, 내릴지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하느님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 코카인을 빨자! 섹스를 많이 하자! 그리곤 가슴팍을 치면서 ― 으음~ (팡팡) 으음~(팡팡) 으으으으음(팡팡)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싶어서 이 세 시간짜리 영화를 몇 번이나 봤다. 이것보다 더 인생의 진리를 명징하게 일러주는 장면이 있는가?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것은 주가뿐만이 아니다. 내일 아침 날씨는 어떨지, 상사의 기분은 어떨지, 남극의 빙하는 무사할지, 평창올림픽에 북한이 참여할지 등등…… 우리는 모른다. 아는 건 하나 뿐이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 딱 그거 하나. 내일 점심시간에 제육볶음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갈 때 즈음, 북한 김정은이 퉁..
1926년, 열아홉 소년이 조선총독부 사무관 시미켄을 죽였다. 그의 이름은 홍민성. 일제는 그를 잡기 위해 헌병대를 출동시켰다. 홍민성은 평안도 등지에서 숨어 지내다 이듬해 12월 ―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몇 해 뒤, 그는 항일무장단체 중 하나인 후비대(後備隊)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후비대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약속받고 산동반도를 향해 행군했는데, 그때 홍민성은 병사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조선에 계신 어머니께서 본 사령관을 걱정하고 있다. 그것은 제군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 걱정은 접어둬라. 부모를 생각하지 마라. 조선의 청년들이 단결해서 부모 말을 듣지 않아야 일본을 무찌를 수 있다. 오직 조선 독립, 그 대의를 위해 싸우자.” 홍민성은 이렇게 말하고 난 뒤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 바쁘게 일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라고 바쁜가?’이다. 바쁨 그 자체가 미덕인 시대가 있었다. 이른바 포디즘(Fordism)의 시대. 만들기만 하면 팔려나갔다. 한국에서는 90년대까지가 이런 시대가 아니었을까? 1987년 민주화와 함께 활발한 소득분배가 일어났고, 마이카 시대가 열리면서 모두가 돈 쓰기 바빴다. 현대차, 삼성전자 같은 기업들도 이때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 수출을 잘 해서 글로벌 기업이 된 게 아니라, 한국 노동자들이 국산품을 마구 사줘서 성장한 셈이다. 이 시대에는 분명 바쁜 사람이 돈을 벌었다. 하지만 IMF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성실하게 일한 직장인들이 해고당했다. 오늘날의 직장인들은 자신의 시간과 건강을 갈..
아침회의가 끝나고,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나한테 너무 버릇이 없단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라 반박하지 못했다. 팀장은 내게 더 겸손해야 많은 걸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건 개소리다. 겸손하라는 건 자기한테 더 빌빌거리라는 소리다. 그리고 씨바 회사에 돈 벌려고 다니는 거지, 뭔가를 배우려고 다니는 게 아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었으면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디 경치 좋은 폭포 밑에서 명상을 하지 ― 뭐 하러 아침에 미어터지는 지하철타고 서울까지 기어 들어와서, 입냄새 나는 아줌마랑 회의실에 앉아 이야기를 하겠냐? 엑셀로 인수인계 파일을 만들어서 세 장을 프린트했다. 팀장이랑 담당자한테 인수인계를 해주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한강 주변을 걸었다. 걷다가 추워서 버스를 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