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나는 학급어린이회의에서 매주 같은 건의사항을 냈다. 운동장에 축구골대를 만들어 달라는 건의사항이었다. 이 건의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 2002년 월드컵이 시작됐다. 나는 빨간티를 입고 대한민국을 응원했다. 우리나라가 축구를 잘하면, 학교운동장에 축구골대가 생길 줄 알았다. 물론 아니었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4강 신화는 초등학교 운동장의 축구골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텔레비전은 외국인들이 붉은 악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같은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어린 나는 ‘초등학교에 축구골대도 안 만들어주는 이따위 나라는 망해버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내 저주가 먹혀들었는지 어땠는지, 한국은 장기적으로 소멸 위기를 맞이했다. 서점에 들렀다가 전영수 교수의 『한국이 소멸한다』를 잠깐 읽었다..
아인슈페너가 마시고 싶어서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날씨가 미치도록 추워서, 카페 가까이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아인슈페너를 마실 참이었다. 카페 주변에는 작은 교자집이 있었다. 교자에서는 에델바이스 맥주와 교자를 세트로 팔고 있었다. 그래서 맥주 한 잔을 마셨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는 술이 조금 아쉬웠다. 2차로 빈티지 라이언이라는 가게에서 맥주를 마셨다. 안주가 엄청 푸짐해서 맥주가 술술 들어갔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많은 맥주를 마셨는데, 그래서인지 사장님이 나한테 명함을 줬다. 사장님은 자신도 책을 내고 싶다, 뭐 이런 얘기를 했는데 ― 취해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 재밌었다. 결론적으로는 나는 원래 가려고 했던 카페에 가지 못했다. 커피는 한 잔 대신 여러 잔의 맥주를 마셨다. 그래도 즐..
징코로민정 건망증 때문에 처방받은 약을먹는다는 걸 자주 잊는다어쩌다가 알약을 삼키면서도수 분 전에 이 약을 먹지 않았었나하고 의심한다 노래방에선 같은 노래를 두 번 부른다그건 괜찮다 나는 혼자 노래한다오락실의 노래방 기계에 천원을 넣는다는 걸실수로 오천원을 넣는다그러면 나는 오래 노래한다 봤던 영화를 보며 같은 장면에서 피식거리고몇 달 전에 내가 썼던 소설을 읽다가 눈물을 흘린다 같은 여자를 두 번 사랑하고도여자의 집 앞 골목에서 길을 잃는다 길을 잃고 나는 노래한다오래 노래한다 - 그림일기가 안 써져서 쓴 詩
온라인서점 면접에서, 면접관이 내게 물었다.“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에요?”“천명관이요.”내가 말했다. 그러자 면접관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는 천명관이 구린 소설가라고 깠다. 천명관은 『고래』 빼고는 별 볼 일 없단다. 진정으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만 아는 ‘숨은 진주’(면접관의 표현)같은 작가 이름을 댔어야한다고 내게 조언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박 뭐시기 작가를 좋아하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고 자기만 좋아한단다. 전형적인 홍대병 말기 환자라고 생각했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그 새끼가 갑이니까. 나는 그래도 붙여주세요, 이제 천명관 안 좋아할게요. 제발요 ― 하는 눈빛을 그에게 쏘아댔다. 물론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는 천명관을 원망했다. 면접 분위기 좋았는데, 천명관 때문에 떨어졌다..
식당에서, 한번쯤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맛있게 먹고 있는데, 상대방이 미식전문가처럼 까다롭게 구는 경우.“이게 맛있어? 난 좀 별론데. 내 생각엔 겉이 좀 더 바삭하고 속이 좀 더 촉촉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말이야, 원래 닭고기가 고기 중에서 제일 맛이 없어. 그러니까 소고기나 돼지고기랑은 다르게 다양한 조리법을 개발할 수밖에 없는데……”그래, 너는 그렇게 씨부려라 ― 하고 혼자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만, 얘기를 듣다보면 나도 입맛이 떨어진다. 괜히 눈치를 보게 되기도 한다. 지가 맛없으면 그냥 지 혼자 맛없으면 그만이지 왜 불만사항을 뇌까리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애정결핍의 한 가지 증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보다 더 똑똑하고 우월해, 더 미식가이기도 해. 그러니깐 너는 나를 찬..
스캔들에 휘말렸다가 복귀한 어느 연예인이 이런 인터뷰를 했다.“하루는 딸이랑 식당엘 갔는데, 메뉴판에 가격표를 살피는 저를 발견했어요. 그때는 정말 내가 불행하구나! 싶었어요.”나는 인터뷰의 이 구절을 보고 그가 나와는 정말 다른 세계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탈세나 표절을 한 적 없고, 스포츠도박에도 관심이 없으며, 군복무도 성실히 이행했음에도 ― 식당에 들어가면 메뉴판에 가격을 살핀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불행한 줄 몰랐다. 아무튼 나는 이 인터뷰를 읽고 세상이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존나 했다. 그리고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다 :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근데 그게 가능한 사람은, 돈이 있으면 더 행복할 것이다. 요즈음 나는 돈을 벌지 않는다..
무당이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을 봤다. 사람은 죽으면 혼령이 되어 구천을 떠돈단다. 시청자 한 사람이 무당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는데, 혼령의 세계는 인구밀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자 무당이 답했다.“맞습니다. 구천에 귀신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그리고 영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죠. 그래서 정신병원에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겁니다.”그는 무당 특유의 매서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랜선을 타고 살이라도 날라 올 기세였다. 그런데 나는 왜인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귀신이 어딨냐 씨바!’ 나는 이렇게 말하고 도망쳤다. 다행히도 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이 표현은 매우 옳다. 거짓말이 새로운 거짓말을 ‘..
KBS 드라마 ‘라디오 로맨스’ 수중촬영이 논란이다. 영하 16도의 날씨에, 배우 김소현이 입수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 문제였다. 배우 김소현씨의 팬들은 극렬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문준하 감독은 이런 해명을 내어놓았다. “김소현 씨는 지난 1일 미리 촬영을 마쳤다. 그때도 안전장비와 체온 보호를 위해서 캠핑카를 배치했다…… 그리고 어제 촬영(최저기온 영하 16도인 날)한 것은 조금 모자라는 분량이 있어서 찍었고 김소현이 아닌 액션배우가 촬영했다.” 주연배우가 물에 들어갔을 때는 체온 보호를 위해 만전을 기했고, 한파가 몰아닥친 날엔 다른 대역배우를 썼으니 걱정 마라는 소리다. 이게 해명이라고 하는 소린가? 차가운 물에 들어가면 추운 것은 누구나 똑같다. 더구나 외출도 자제하라는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던 날이..
바이킹족은 얼어붙은 땅에 그린란드라는 이름을, 반대로 사람이 살만한 섬엔 아이슬란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 한국에도 ‘바이킹족같은’ 새끼들이 많다. 이를테면 홍대입구의 걷고 싶은 거리. 누가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몰라도 나는 그 거리를 걷기 싫다. 버스킹 소리가 뒤섞여서 머리는 혼란하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일행을 잃어버리기 일쑤다. 단연코 우리나라에서 가장 걷기 좆같은 길이 바로 이 길이다. 부산 사하구의 감천문화마을도 그렇다. 거기엔 아무런 문화가 없다. 역사적으로 감천동은 태극도라는 종교를 믿는 신자들이 모여 사는 조용한 신앙촌이다. 그 고요함이 그들의 문화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시에서 건물마다 벽화를 그려 넣고, 예술이랍시고 빈 집에 설치미술품을 갖다놓은 뒤부터 ― 거기엔 문화가 없다...
음식을 배달시키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하 19도였다. 그래서 나는 롯데리아를 시켰다. 맛과 가격을 고려해보았을 때 ― 배달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시간대가 애매해서인지 롯데리아는 배달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에 먹던 중국집에서 짜장면 탕수육 세트를 주문했다. 1분 정도가 흐른 뒤에 중국집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중년 남자 목소리였다. “저기…… 도로명주소로 하면 저희가 찾아가기가 어려워서요. 옛날 번지 주소를 좀 알 수 있을까요?”“저번에 시켰을 때는 그냥 배달해주시던데요.”“아, 그게 오늘은 사정이 좀 있어서요.” 결국 나는 인터넷으로 도로명주소를 옛 주소로 바꾼 뒤에, 중국집에다가 알려주었다. 중국집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