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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는 프랑스 말로 관용, 포용력 뭐 그런 거란다. (왜 굳이 불란서말로 쓰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게 이 단어를 최초로 가르쳐준 고등학교 윤리 선생은 지독한 예수교 신자였다. 학교 자체가 기독교 재단의 미션스쿨이었고, 그녀는 수업 시작 전에 모든 학생들에게 눈을 감게하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기도를 했다. 가끔 울면서 통성기도하기도 했던 것 같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교내방송을 통해 교목(나무가 아니라 교내 목사라는 뜻)이 학교 전체에 기도를 하는 학교였지만 수업 시간에 기도하는 것은 조금 유난스러운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수업시간에는 기도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터져 나왔고, 누군가 교과서 모퉁이에 있던 똘레랑스라는 단어를 찾아와서 윤리 선생과 대거리를 했다.

선생님, 하나님만 유일신이고, 나머지는 다 가짜라는 기독교 신앙은 똘레랑스가 없는 거 아닌가요? 똘레랑스를 가르치는 윤리시간이라면 더더욱 학생들에게 기도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이 외쳤다. 그러자 윤리 선생이 답했다.

하나님 이외에는 모두 가짜고 잡신이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야. 그 믿음을 존중하지 않는 네 태도가 똘레랑스가 없는거지.”

아니, 그럼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똘레랑스가 없는 상대를 인정하는 똘레랑스가 저한테 필요하다는 건가요?”

이 논쟁이 정확히 어떻게 끝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얼마 뒤에 그 윤리 선생은 더 이상 수업 시간에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

프랑스에 똘레랑스가 있다면 한국에는 누칼협이 있다. ‘누가 칼들고 협박함?’의 줄임말인데, 아무도 너한테 그러라고 협박하질 않았으니, 너 자신이 네 선택에 책임을 지라는 뜻이다. 언론이 이 단어를 비판적으로 쓰기도 했고, 요즘은 유행이 좀 지나기도 한 표현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좋다.

누칼협을 좋게 표현하면 아무도 우리 사회에 칼들고 협박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자유롭고, 웬만큼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다. 힘들면 때려치면 그만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 똘레랑스를 발휘해서 우리 사회를, 집단을, 학교를, 직장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서로 관용하고 토론하는 것도 물론 좋다. 근데 그건 너무 골치 아프다. 똘레랑스는 진짜 서로 칼들고 있을 때나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요즘 드는 생각은, 생각보다 죽기 살기가 걸린 일은 없다는 것이다. 생존 문제와 연결해서 보면 모든 것은 너무 한가한 고민거리들이다.

그저 나는 민도가 좋은 동네에서, 좋은 사람들만 마주치면서 살고 싶다. 이는 노력을 통해 성취가 가능한 목표이다. 고대에는 내가 아무리 애써도 돌도끼 들고 누군가 나를 협박했을지도 모르고, 조선시대만 해도 칼부림이 만연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일 없다. 누가 칼들고 협박하지 않는다. , 이 얼마나 행복한 세상인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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