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다른 매체들과 달리 어떤 ‘신성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책이 유일한 정보전달매체이던 시대의 관습 때문이다. 불과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책은 최첨단 매체였다. 조선에서는 중국을 방문한 사신들은 열 권 남짓한 책을 천자에게 하사받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조선 왕부터 양반에 이르기까지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도 필사를 해가면서 읽었다. 그 시대의 도서관은 첨단 정보를 저장해놓은 곳으로 ― 오늘날의 슈퍼컴퓨터 같은 역할을 했다. 고로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었다. 오늘날의 책은 어떤가? 책은 점차 ‘신성한 권위’를 잃어나가는 중이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문자는 대중화되었다. 도서관 역시 개방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누워서 트림을 하면서, 방귀를 끼면서도 책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책보다 접..
1926년, 열아홉 소년이 조선총독부 사무관 시미켄을 죽였다. 그의 이름은 홍민성. 일제는 그를 잡기 위해 헌병대를 출동시켰다. 홍민성은 평안도 등지에서 숨어 지내다 이듬해 12월 ―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몇 해 뒤, 그는 항일무장단체 중 하나인 후비대(後備隊)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후비대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약속받고 산동반도를 향해 행군했는데, 그때 홍민성은 병사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조선에 계신 어머니께서 본 사령관을 걱정하고 있다. 그것은 제군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 걱정은 접어둬라. 부모를 생각하지 마라. 조선의 청년들이 단결해서 부모 말을 듣지 않아야 일본을 무찌를 수 있다. 오직 조선 독립, 그 대의를 위해 싸우자.” 홍민성은 이렇게 말하고 난 뒤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 바쁘게 일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라고 바쁜가?’이다. 바쁨 그 자체가 미덕인 시대가 있었다. 이른바 포디즘(Fordism)의 시대. 만들기만 하면 팔려나갔다. 한국에서는 90년대까지가 이런 시대가 아니었을까? 1987년 민주화와 함께 활발한 소득분배가 일어났고, 마이카 시대가 열리면서 모두가 돈 쓰기 바빴다. 현대차, 삼성전자 같은 기업들도 이때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 수출을 잘 해서 글로벌 기업이 된 게 아니라, 한국 노동자들이 국산품을 마구 사줘서 성장한 셈이다. 이 시대에는 분명 바쁜 사람이 돈을 벌었다. 하지만 IMF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성실하게 일한 직장인들이 해고당했다. 오늘날의 직장인들은 자신의 시간과 건강을 갈..
아는 사람 중에 응급구조사가 있다.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글로 써도 되나 싶지만, 어차피 쓰기 시작했으니까 그냥 계속 쓰겠다. 그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환자가 응급실에서 살아나는 것보다 죽는 편이 행정적으로 훨씬 편하단다. “살아나면 이것저것 써야할게 많아서, 그냥 죽어라, 싶을 때도 있어.” 나는 그의 이야기가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응급구조사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쌍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가 비싼 밥을 샀기 때문이다. 나는 최대한 그의 편에 서서 생각해보려고 애썼다. 그 결과, 나는 월급쟁이 비관론자답게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 세상에 돈 받고 하는 일은 죄다 좆같다. 그게 사람을 살리는 일이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든, 아무튼 뭐든 다 마..
부모님과 친척들은 내가 회사를 그만뒀다는 걸 모른다. 새해를 맞아서 고향 집에 내려갔다. 용돈도 드렸다. 거 참, 난감한 일이다. 나는 회사생활이 힘들다고 밑밥을 깔아두었다. 언젠가 내가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었을 때, 놀라지 않도록. 내 어머니는 월급쟁이가 최고라는 사실을 늘 강조하신다. 고도성장기에 청년기를 보내고, 중년에 IMF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와 같은 세계적인 불황을 목격한 탓이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우리 젊을 때는 공무원이라고 하면 선도 안 봤다.’면서, 당시 공무원이 얼마나 인기가 없는 직업이었는지를 강조하셨다. 그 시절엔 다들 ‘뭘 몰라서’ 월급쟁이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식이다. 무조건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월급이 적어도 불평 갖지 말고…… 뭐 이런 식의 조언도 해주셨..
아침회의가 끝나고,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나한테 너무 버릇이 없단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라 반박하지 못했다. 팀장은 내게 더 겸손해야 많은 걸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건 개소리다. 겸손하라는 건 자기한테 더 빌빌거리라는 소리다. 그리고 씨바 회사에 돈 벌려고 다니는 거지, 뭔가를 배우려고 다니는 게 아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었으면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디 경치 좋은 폭포 밑에서 명상을 하지 ― 뭐 하러 아침에 미어터지는 지하철타고 서울까지 기어 들어와서, 입냄새 나는 아줌마랑 회의실에 앉아 이야기를 하겠냐? 엑셀로 인수인계 파일을 만들어서 세 장을 프린트했다. 팀장이랑 담당자한테 인수인계를 해주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한강 주변을 걸었다. 걷다가 추워서 버스를 탔다. ..